세계 1위 손톱깎이 기업의 몰락, 상속세의 그림자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장녀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이 최근 보유 중이던 롯데지주와 롯데쇼핑 주식을 전량 처분했습니다.
매각 규모는 총 730억원에 달하는데요. 롯데재단 측은 "상속세 마련을 위한 조치"라고 밝혔습니다.
신 의장은 2020년 1월 부친 사망 이후 롯데 계열 지분을 상속받고, 이에 따른 상속세를 연부연납 방식으로 분할 납부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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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롯데재단 사례뿐만 아니라 대기업 중심으로 승계 및 상속세 이슈가 최근 몇 년간 큰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는데요. 재계를 비롯해 각계에서도 한국의 상속세가 기업 경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중소·중견기업들은 과도한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회사를 매각하거나 경영권을 넘기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세계 1위 손톱깎이 기업이었던 '쓰리세븐(777)'입니다.
상속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쓰리세븐
1975년 설립된 쓰리세븐은 손톱깎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기술력과 품질을 인정받은 기업입니다.
특히 33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2008년 창업주 김형규 회장이 별세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유가족과 임직원은 무려 15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제약 업체 중외홀딩스에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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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 김형규 회장의 사위가 설립한 티에이치홀딩스가 쓰리쎄븐을 되찾아오지만, 이전 회사 매출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2023년 매출은 160억원 수준으로 예전의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상속세로 무너진 국내 강소기업들
쓰리세븐 이외에도 상속세 부담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기업들은 많습니다.
잘 알려진 '락앤락' 역시 2017년 창업주 김준일 회장이 4000억원이 넘는 상속세 부담 때문에 회사를 사모펀드에 매각했습니다.
이후 홍콩계 사모펀드는 수익성을 앞세워 한국과 해외 공장 대부분을 매각하고 베트남 생산 공장과 위탁 생산 등을 통해 제조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대 가구·인테리어 업체였던 한샘도 창업주 조창걸 전 명예회장의 직계가족 중 경영 후계자가 없고 막대한 상속세를 내기 어려워 2021년 사모펀드에 매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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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속세, 세계 최고 수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로 한국의 상속세가 지나치게 과도하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30억원 초과)로 일본(55%)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6%)과 비교해도 차이가 큽니다.
한국의 상속세 부담이 특히 높은 이유는 높은 최고세율과 함께 공제 수준은 낮고, 또 유산세 방식의 과세 체계가 결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특히 OECD 회원국 중 유산세 방식으로 배우자 상속분까지 세금을 매기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상속세 정책
이와 달리 다른 나라들은 상속세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화시키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상속세 최고 세율이 55%로 세계 1위이지만, 한국과 달리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세금을 걷고 배우자 상속세도 면제해 줍니다. 또한 중소기업 경영자가 가업 승계를 목적으로 상속하는 경우 상속세를 80%(2027년까지는 100%) 면제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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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1940년대 60%에 달하는 강력한 상속세를 도입했으나, 기업 파산과 고액 자산가들의 이민 등 사회문제가 이어지자 2005년 상속세를 전면 폐지한 바 있습니다.
캐나다는 1971년 OECD 회원국 중 처음으로 상속세를 폐지하고, 대신 양도소득세 방식의 '자본이득세'를 도입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최고 세율 인하를 50%에서 40%로 인하하고 자녀공제액을 10배 상향하는 내용의 상속세 관련 개정안이 정부안으로 발의됐지만 '부자 감세' 비판 및 '세수 부족' 등의 이유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중소기업계의 목소리
지난해 한국무역협회가 중소기업인 79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42.2%는 "상속세 문제 등을 이유로 기업 승계를 하지 않고 매각이나 폐업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국내 중소기업인의 절반가량이 과다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가업 승계를 포기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종의 자구책으로 '가업승계 조세특례'를 노리거나 다른 솔루션 등을 찾아 위기를 돌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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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계에서는 상속세 때문에 기술력 있는 업체들이 승계 과정에서 망가지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상당수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은 대부분 1980, 1990년대에 창업했기에 상속 시점에 와 있다"면서 "지금 상속세를 개정하지 않으면 강소 기업 상당수가 해외에 팔리거나 사모펀드로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율과 낮은 공제 혜택은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쓰리세븐과 같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경영권을 넘기고 쓰러지는 국가적 손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입장에서 상속세 제도 개선 논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