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03일(월)

끝까지 고개 숙이지 않았던 청년... 116년 전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의 선명한 모습 공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대한의 독립을 위해 권총을 든 청년 안중근(1879∼1910)은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그는 평소 교육과 계몽 활동에 힘썼던 인물이었지만, 국권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정의의 응징'이 민족의 길이라 믿었습니다.


의거 직후 체포된 안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 의해 조사받은 뒤 일본 측에 인계돼 뤼순 감옥으로 이송됐고, 이듬해 3월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과거 공개됐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 / 안중근의사기념관 


그날 이후 116년 만에 포승줄에 묶이고도 의연했던 안 의사의 모습이 다시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지난 23일 국사편찬위원회는 그동안 보관해 온 '안중근 유리건판 사진 자료'를 고해상 디지털 자료로 복원·공개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유리건판 자료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직후, 러시아와 일본 당국이 각각 촬영한 원본 사진을 조선총독부가 복제한 것입니다. 유리건판은 일반 필름보다 해상도가 높고 내구성이 뛰어나 1940년대까지 기록 보관용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image.png새롭게 공개된 안중근 의사의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조선총독부는 장기 보존이 필요한 중요 자료를 유리건판 형태로 제작해 관리했으며, 이번 자료 역시 그 일환으로 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번 사진에는 체포 직후 러시아 관헌에게 연행된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이후 일본 측에 신병이 인계된 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image.png(좌) 우덕순(우연준), (우) 조도선 / 국사편찬위원회


첫 번째 사진 속 안 의사는 포박당하지 않은 채 당당히 서 있습니다. 문일웅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10시 10분 사이, 러시아 동청철도 헌병관리국 조사실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촬영된 두 장은 10월 27일 오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측 인계 직후 찍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 의사는 포승줄에 묶인 채 다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image.png(좌) 유동하, (우) 탁공규 /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당시 일부 사진은 11월 9일 통감부에 발송됐고, 일제는 이를 복제해 안중근 의사의 동지들을 색출하고 추궁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공개 자료에는 안 의사와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의 모습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얼빈 의거 공모자 우덕순(1880∼1950), 조도선(1879∼?), 유동하(1892∼1918) 등이 대표적입니다.


image.png(좌) 이진옥, (우) 김성엽 / 국사편찬위원회


이들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된 뒤 약 6일간 조사를 받고 일본 측에 인계돼 뤼순 감옥으로 압송됐습니다. 사진은 러시아 감옥을 나와 10월 31일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밖에도 하얼빈 한인들이 설립한 동흥학교 교사 탁공규(1874∼?), 일본 관헌이 '밀정'으로 기록한 이진옥(생몰년도 미상)의 모습도 확인됩니다.


image.png(좌) 장수명, (우) 김택신 /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는 각 사진의 촬영 시점, 장소, 인물 정보뿐 아니라 기존의 역사적 오해나 오류를 바로잡는 해제도 함께 공개했습니다.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번 공개를 통해 안중근 의사와 그 동지들의 숭고한 뜻을 다시 새기고,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위원회는 향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 식민 통치 관련 사료를 추가로 정리해 공개할 예정입니다.


image.png(좌) 방사첨, (우) 김여수 / 국사편찬위원회


image.png(좌) 김성옥, (우) 정서우 / 국사편찬위원회


image.png(좌) 김형재, (우) 홍시준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