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소주 창업자...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한글 가르치다 해고된 교사
광복 80주년을 맞아 과거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기업 '창업주'들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하이트진로 창업주인 故 장학엽 선생이 일제 강점기 조선어를 가르치다 해고된 일화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1923년 4월, 황해도 곡산 공립 보통학교. 조선어 시간에 학생들의 목청 높은 합창이 교실을 가득 메웠습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사진=인사이트
권학가(勸學歌)를 부르는 학생들의 눈가에는 나라 잃은 슬픔이 묻어났는데요. 이 수업을 이끈 스물한 살 청년 교사 장학엽은 그날 저녁, 일본인 교장 후지야마 키요시에게 불려가 모욕적인 힐책을 받았습니다.
조선어로 권학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교단에서 양조장으로, 독립의 꿈을 품다
결국 장학엽은 교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 손으로 학교를 세워 실력 있는 젊은이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육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광산, 철도, 금융 등 주요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은 정미소나 양조장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진로 창업주 고(故) 장학엽 선생 /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민 끝에 장학엽은 양조업 경험이 있던 홍석조, 강기욱 두 동업자와 함께 각자 500원씩 투자해 자본금 1,500원으로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했습니다.
술의 이름은 '진로(眞露)'로 정했습니다. 1924년 가을, 그의 나이 21살 때였습니다.
진로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닌,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장학엽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증류식 소주를 고집했습니다. 희석식 소주는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교육자의 꿈을 이루다
교육자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장학엽은 해방 이후인 1946년, 드디어 진지소학교, 진지중학교, 진지여고 등을 개설하며 교육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비록 6·25전쟁으로 사업 기반을 모두 잃었지만, 1954년 서울에 서광주조를 세워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장학엽은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 등 독특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며 1970년대에는 소주 시장 1위에 올랐습니다.
하이트 진로
1974년에는 우천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자로서의 숙원도 달성했습니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회사명을 '진로'로 바꾸어 오늘날의 하이트진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민족정신을 담은 한 잔의 소주
장학엽 선생의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꿈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보여줍니다.
그가 만든 진로 소주는 단순한 주류 상품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은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광복절에 진로 소주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광복절을 기념하며 한 잔의 소주에 담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