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04일(금)

라면 국물 하나로 전세계를 울린 농심 신춘호 회장님을 아시나요?

한국 라면 역사의 시작, 신춘호의 '국민 한 끼' 도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서 1965년 9월 18일, 단돈 5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시작된 작은 라면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한국 식품 산업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의 셋째 동생인 신춘호는 일본에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35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국민의 한 끼'를 책임지겠다는 사명감으로 '롯데공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형 신격호는 "라면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며 동생의 사업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신춘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65년 12월, 그는 첫 제품인 '롯데라면'을 출시하며 한국 라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에게 라면은 단순한 식품이 아닌, 국민의 삶을 위로하고 따뜻한 끼니를 제공하는 하나의 문화였다.


10년 후인 1975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문구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농심라면'을 출시하며 라면 업계의 판도를 바꿨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1978년에는 회사명을 현재의 '농심'으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라면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형제는 결별하게 되었고, 농심과 롯데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시 초기 농심라면


"한국인은 국물로 산다" - 신라면 탄생의 비하인드


당시 한국 라면 시장은 일본에서 들어온 볶음식 라면이 주류였다.


기름진 면과 짠맛 위주의 분말 스프는 영양보다는 간편함을 무기로 소비자들에게 팔렸다. 그러나 신춘호 회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인은 국물로 산다"라는 그의 통찰은 단순한 식문화 해석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를 꿰뚫는 깊은 이해였다.


그는 국물 라면 개발을 위해 개발팀에 수백 번의 시제품을 만들게 하고, 전국의 육수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맛은 진심이 담긴 국물에서 난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86년, 마침내 '신라면'이 세상에 나왔다.


신춘호 회장은 자신의 성(姓)을 걸고 이 제품을 출시했다.


검붉은 포장지, 쫄깃한 면발, 그리고 매운 국물로 특징지어진 신라면은 처음에는 너무 맵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한 번 맛본 소비자들은 계속해서 찾게 되었다.


이렇게 신라면은 점차 '국민 라면'으로 자리 잡았다.


故 신춘호 회장 / 농심


위기 속에서 빛난 기업가 정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많은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인상할 때도 신춘호 회장은 신라면 가격을 동결했다.


"국민이 어려울 때 기업이 더 무겁게 짐을 져야 한다"는 그의 결정은 일시적인 손실을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충성도를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춘호 회장의 경영 철학은 명확했다.


"먹는 것에는 진심이어야 한다." 그는 단순히 라면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한 끼'와 '위로'를 제공했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전체 경영 활동에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며 소통하고, 품질 중심의 경쟁을 추구하며, '농심 가족'이라는 개념을 실제 기업 문화로 정착시켰다.



국민의 위안에서 세계인의 음식으로


오늘날 신라면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수출되는 글로벌 식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뉴욕부터 모스크바, 도쿄, 하노이, 심지어 케냐의 작은 상점에서도 신라면의 붉은 포장을 볼 수 있다.


해외 진출 초기에 전문가들은 "매운맛은 외국인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신춘호 회장은 한국적 매운맛을 고수했다.


현지화보다 정체성을 선택한 결과, 오히려 전 세계 소비자들이 한국의 맛에 적응하게 되었다.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농심은 이제 단순한 식품회사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신춘호 창업주가 남긴 유산은 라면 그 자체를 넘어, 어려운 시대를 견디게 해준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의 위안이다.


그 국물 속에는 땀과 철학, 그리고 국민을 생각한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 담겨 있다.


호치민 현지 마트에서 판매중인 신라면 / 사진=인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