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보통주 시총 넘어선 SK하이닉스
적자기에도 HBM 품은 승부수, AI 시대 대표주로 돌아왔다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 보통주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삼성전자 우선주까지 더하면 국내 증시 1위 자리는 여전히 삼성전자에 있지만, 단일 종목 기준으로는 한국 증시의 상징적 순서가 바뀐 셈이다.
역전은 장중에 일어났지만, 그 장면은 하루 만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2012년 인수 이후 이어진 투자, 2023년 반도체 겨울을 버틴 시간, AI 사이클을 먼저 본 판단이 겹쳤다.
사진 제공 = SK그룹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름이 다시 소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은 최 회장의 반도체 승부수를 2012년 하이닉스 인수에서 찾는다. 내부 반대와 시장 우려를 뚫고 대규모 반도체 회사를 사들인 결단은 분명 SK그룹의 체질을 바꾼 출발점이었다.
더 큰 장면은 그 이후에 나왔다. 반도체 업황이 꺾이고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적자를 낸 2023년이다. 최 회장은 그때 하이닉스를 줄여야 할 부담이 아니라 더 크게 키워야 할 미래 자산으로 봤다.
모두가 부담이라 할 때, 최태원은 길목을 봤다
2023년 SK하이닉스는 연간 7조7천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냈다. 메모리 가격은 무너졌고 재고 부담은 커졌다. 반도체는 그룹 실적을 끌어내리는 사업처럼 보였다. 시장은 감산과 비용 절감, 투자 속도 조절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SK는 그 시간을 비용 절감의 시간으로만 보내지 않았다. 반도체 겨울을 맞은 구성원들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4분기 흑자 전환 직후 구성원들에게 자사주 15주와 격려금 2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7조원대 적자를 버틴 사람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단순한 위로금이 아니었다. 하이닉스를 줄여야 할 부담이 아니라, 다음 AI 사이클까지 함께 끌고 가야 할 자산으로 본다는 메시지였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왼쪽)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오른쪽) / 사진 제공 = SK하이닉스
최 회장의 판단력은 여기서 빛났다. AI 서버가 늘어나면 연산을 받쳐줄 메모리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고, 그 중심에 HBM이 설 것이라는 흐름을 봤다. 당시 HBM은 지금처럼 자본시장의 주류 언어가 아니었다. AI 수요가 어디까지 커질지, 글로벌 빅테크의 투자가 얼마나 지속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 시기에 그룹은 하이닉스를 움츠러들게 하지 않았다. HBM과 DDR5 같은 고부가 메모리의 끈을 놓지 않았고, AI 메모리 시장의 길목을 지켰다. 적자가 커진 사업을 비용으로만 보면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승부는 업황이 꺾였을 때 갈렸다. 모두가 몸을 낮출 때 SK는 다음 수요가 향할 곳을 봤다. SK하이닉스는 그 시간을 지나 AI 메모리 시장의 앞자리에 섰다.
변화는 빠르게 돌아왔다. 2023년 4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한 SK하이닉스는 HBM3와 DDR5를 중심으로 실적 회복의 실마리를 잡았다. AI 반도체 시장이 커지면서 HBM은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공급망의 병목이 됐다. SK하이닉스는 그 병목을 장악한 회사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하이닉스를 SK의 미래 언어로 만든 총수
최 회장은 하이닉스를 조용히 품고 있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공개석상에서 AI와 메모리 공급 부족을 수차례 강조했고, SK하이닉스를 그룹의 미래가치를 설명하는 전면에 세웠다. 하이닉스는 더 이상 메모리 업황에 따라 실적이 오르내리는 계열사 하나가 아니었다. SK그룹이 AI 시대에 어떤 자산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왼쪽)과 웨이저자 TSMC 회장(오른쪽) / 사진 제공 = SK하이닉스
이 과정에서 SK그룹의 포트폴리오도 달라졌다. 통신과 에너지, 화학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SK는 하이닉스를 통해 AI 인프라 밸류체인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HBM, 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통신망으로 이어지는 그림 안에서 SK하이닉스는 맨 앞에 놓였다.
이제 SK하이닉스는 그룹의 미래를 설명하는 가장 강한 이름이 됐다. 한때 그룹 실적을 짓누른 적자 사업은 AI 시대의 대표 자산으로 바뀌었다. 최 회장이 2012년 하이닉스를 산 것이 첫 번째 승부수였다면, 2023년 적자 속에서도 하이닉스를 놓지 않은 선택은 그 승부수를 완성한 두 번째 결단이었다.
이번 시총 역전은 그래서 단순한 순위 변화가 아니다. 최 회장이 2012년 산 하이닉스가 2023년 반도체 겨울을 지나 AI 시대의 대표주로 올라선 장면이다. 이날 SK하이닉스의 시총은 최 회장의 선택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줬다.
물론 순위는 다시 바뀔 수 있다. 삼성전자는 우선주를 포함하면 여전히 국내 최대 시가총액 기업이다. HBM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추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고객사 집중도와 대규모 투자 부담도 SK하이닉스가 풀어야 할 과제다.
최 회장이 산 것은 하이닉스라는 회사 하나가 아니었다. 반도체 사이클을 견딜 시간, 적자를 감내할 체력, AI 시대를 기다릴 권리까지 함께 산 셈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 사진제공=SK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