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간 서울 지하철 안내방송 담당한 강희선 성우, AI 대체 소식에 충격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번 역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의 주인공인 강희선 성우(65)가 예상치 못한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강희선 성우는 29년간 서울 지하철 한국어 안내방송을 담당해왔습니다.
2021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매년 녹음을 이어올 정도로 이 일에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지난달 30일, 병상에서 TV 종합편성채널을 시청하던 중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강희선 성우 목소리가 앞으로는 AI(인공지능) 음성으로 대체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강 성우는 이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강 성우의 큰 아들 안은석씨(40)는 3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저희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해고 통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안씨는 어머니를 병간호하던 중 'AI 목소리 대체 예정' 뉴스를 함께 보았다고 전했는데요. "뉴스를 보시고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냐고요? '회의감 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성우계 대표 인물로서의 경력과 최근 건강 문제
강희선 성우는 1979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성우계의 베테랑입니다.
'짱구는 못말려' 속 짱구 엄마 봉미선, 외화 '에린 브로코비치'의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 트라멜(샤론 스톤) 목소리를 맡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26년간 '짱구는 못말려'에서 짱구 엄마와 맹구 목소리를 담당했던 강 성우는 지난 8월 건강상 문제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습니다.
안씨는 강씨가 하차를 결정할 때에는 '투니버스' 채널과 한 달간의 조율 과정을 거쳤다고 전했습니다.
안씨는 "('짱구는 못말려' 하차 때는) 채널과의 충분한 협의가 있었고, 절차적인 정당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교통공사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이 '대체될 것'이란 기사를 보게 된 겁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항암 투병 중에 척추가 부러졌는데도 복대를 차고 가서 (지하철 안내 방송) 녹음을 한 어머니에게, 공사가 이래도 되나요?"라고 분노를 표했습니다.
저작권 침해 논란과 서울교통공사의 해명
보도에서 서울교통공사 측은 "'성우 음성이 학습된' 방송으로 이질감을 최소화하겠다"고 설명했는데, 이로 인해 '강 성우의 목소리를 무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인가'하는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한국성우협회 등은 3일 성명에서 "투병 중인 성우의 목소리를 AI 학습에 마음대로 이용하겠다는 서울교통공사의 계획은 저작권법상 실연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이자 윤리적 측면에서도 비난받을 만한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논란이 거세지자 서울교통공사 측은 "AI 음성 제작에 강 성우의 목소리를 무단으로 사용하려던 것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공사는 강 성우가 녹음할 수 없어질 상황에 대비해 인공지능 음성 합성(AI TTS) 기술 도입을 검토한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안'에 불과한 단계에서 확정 사실처럼 보도가 됐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AI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과 인간적 가치의 대립
가안에 불과하더라도 이번 사건은 성우의 목소리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AI로 대체하기 쉬워진 시대를 보여줍니다.
서울교통공사는 검토안에서 AI 음성 제작이 "성우 건강 등 외부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 시스템"이며 "성우 녹음에 약 2500만원이 들고 방송까지 2-3주가 걸리지만 인공지능 음성 합성은 500~1250만원에 1일 이내로 제작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미 서울 지하철 1·3·4호선 일부 구간을 운영하는 코레일은 2018년 AI 안내 방송을 도입한 바 있습니다.
강 성우는 지난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이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강 성우는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없더라고요. 성우가 바뀌었나, 저로서는 섭섭하잖아요. 우리는 돈을 따지지 않아요. 그 어떤 자부심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런데 코레일이 AI로 (목소리를) 바꾸었대요. 가서 직접 들어봤는데, (영) 아니더라고요. 사람의 정서가 없어요"라고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강 성우는 "종착역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할 때 저는 온 힘을 다해서 진심으로 인사해요. AI는 따뜻함이 없어요. 인간의 정서도 없고"라고 AI 음성과 인간 목소리의 차이점을 강조했습니다.
안씨는 성우로서의 자부심이 큰 어머니가 이 일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위중한 상태는 아니지만, 최근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찾아 호전되던 중이었다"고 어머니의 현재 상태를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