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08일(일)

폐업 위기 골목식당에 '신라호텔 셰프'가 찾아왔다... 제주에서 시작된 특별한 동행

제주 골목상권의 작은 식당에 5성급 호텔 셰프들이 찾아왔다. 메뉴 개발부터 조리법 전수, 상권 분석과 서비스 교육까지. 경영난을 겪는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호텔의 전문성을 전수하기 위해서다.


호텔신라가 2014년 시작한 '맛있는 제주만들기(맛제주)' 프로젝트는 단순한 금전 지원 대신 식당의 자생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호텔 운영 과정에서 축적한 조리·서비스 노하우를 개별 식당의 환경에 맞춰 적용하는 방식이다.


지난 13년간 제주 지역 식당 28곳의 재개장을 지원한 호텔신라는 올해 29호점 지원에도 착수했다. 일부 참여 점주들은 자발적인 봉사활동으로 받은 도움을 지역사회에 돌려주고 있다. 기업의 전문성을 활용한 사회공헌이 지역사회 안에서 또 다른 나눔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5성급 호텔 노하우를 골목식당에... 메뉴부터 경영까지 '토털 솔루션'


인사이트2018년 6월 10일,프랑스의 미쉐린 3스타 셰프 자크 마르콩(Jacques Marcon)이 호텔신라의 사회공헌 활동인 '맛있는 제주만들기' 6호점 '진미네 식당'을 방문해 요리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 사진 제공 = 호텔신라


호텔신라의 '맛있는 제주만들기'가 기존 사회공헌 활동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지원 방식에 있다. 일회성 금전 지원에 그치지 않고 영세 식당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실질적인 경영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프로젝트는 호텔신라가 제주특별자치도, 지역 방송사 JIBS와 손잡고 추진하는 지역 상생 프로그램이다. 제주도청 주관 선정위원회가 지원 대상 식당을 선정하면 호텔신라의 조리·시설·서비스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팀이 현장에 투입된다.


지원 범위도 폭넓다. 식당 주변의 상권과 주요 고객층을 분석해 적합한 메뉴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호텔 셰프들이 직접 조리법을 전수한다. 여기에 고객 응대 서비스 교육, 주방 설비 교체, 식당 환경 개선, 마케팅 지원까지 식당 운영 전반을 아우른다.


핵심은 '맞춤형'이다. 유명 호텔의 레시피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점주의 조리 역량과 주변 상권의 특성, 고객 수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각 점포에 적합한 해법을 찾는다. 


실제 2015년 재개장한 12호점 '청춘테이블'은 학교 앞에 위치한 8평 규모의 작은 분식집이었다. 당시 하루 평균 고객 수가 10명, 매출이 3만원 수준에 머물며 폐업까지 고민하던 곳이다.


호텔신라는 인근 주민과 학생들의 메뉴 선호도를 조사한 뒤 기존 떡볶이와 김밥을 개선하고, 토마토를 활용한 이색 메뉴 '토마게티'를 새롭게 선보였다. 맛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 고객층의 취향을 반영해 메뉴 자체의 매력을 높인 것이다.


2019년 재개장한 22호점 '뉴 남원분식'에도 비슷한 접근법을 적용했다. 9평 남짓한 매장의 공간적 제약을 고려해 포장 판매가 가능한 메뉴를 개발하고, 흑돼지 불고기 덮밥과 톳 쌀국수 등 차별화된 음식을 선보였다.


인사이트22호점 ' 뉴 남원분식'의 '톳 쌀국수' / 사진 제공 = 호텔신라


이처럼 식당마다 처한 환경과 운영상의 어려움을 먼저 진단한 뒤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이 맛제주 프로젝트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제주 식재료에 호텔 셰프의 손길... '제주의 맛'을 경쟁력으로


호텔신라가 맛제주 프로젝트에서 공을 들이는 또 다른 분야는 제주 지역 고유의 식재료를 활용한 메뉴 개발이다. 제주 흑돼지와 전복, 톳, 구좌 당근 등 지역 특산물을 호텔의 전문 조리기술과 접목해 개별 식당만의 대표 메뉴로 만드는 방식이다. 영세 식당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관광객에게는 제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먹거리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재개장한 18호점 '세평맛집'이다. 당시 이 식당은 주방을 담당하던 아내가 암 판정을 받으면서 남편 홀로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전문적인 조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남편은 식당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병원비와 자녀 교육비 부담까지 겹치면서 생계가 막막해졌다. 호텔신라는 이 식당의 재기를 위해 지역 특색을 살린 메뉴 개발에 나섰다. 국내 주요 당근 산지인 제주 구좌 지역의 특성을 활용해 당근을 국수에 접목한 '세평고기국수'를 개발했다. 여기에 제주 흑돼지를 활용한 돈가스와 문어 한 마리를 통째로 넣은 샤부 요리 등을 선보이며 지역 식재료를 식당만의 차별화된 강점으로 탈바꿈시켰다.


2024년 재개장한 27호점 '제주온반'에서는 약 3개월간의 맞춤형 컨설팅을 통해 주변 상권과 점주의 강점을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주산 소사골과 흑돼지뼈를 혼합해 우려낸 육수에 무와 톳 등을 더한 '흑돼지곰국'과 '해장국밥'을 개발했다. 기존 메뉴인 돔베고기에는 수비드 조리법을 접목해 균일한 맛을 구현하는 등 호텔의 전문 조리기술을 적용했다.


지난해 12월 재개장한 28호점 '한림돼지국밥' 역시 지역색을 살린 메뉴 개발에 집중했다. 제주산 사골과 돼지뼈를 3일간 우려낸 육수를 바탕으로 기존 국밥의 품질을 개선하고, 한림 지역산 미나리를 활용해 차별화를 꾀했다. 제주식 모둠 분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닥치기'와 '김치말이 고기국수'도 새롭게 선보였다.


호텔신라가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제주 식재료와 점주의 개성이 어우러진 메뉴를 개발해 고객이 해당 식당을 찾아야 할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개별 식당의 매출 확대를 넘어 제주 음식문화의 다양성을 높이고, 지역 관광의 매력을 키우는 효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인사이트2018년 10월 20~21일 제주시민복지타운에서 열린 '제3회 제주음식박람회'의 '화합의 비빔밥 만들기' 행사에서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 제공 = 호텔신라


2014년 시작해 28개 식당 재개장... 29호점 지원 나선 호텔신라


맛제주 프로젝트는 2014년 2월 1호점 '신성할망식당' 재개장을 시작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 당시 신성할망식당은 가족의 투병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정상적인 식당 운영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호텔신라는 기존 대표 메뉴인 고기국수와 순대국밥의 맛을 개선하고, 할망돼지볶음 등 신메뉴를 개발했다. 고객 응대 교육과 주방 설비, 외관 개선도 함께 진행했다.


이후 프로젝트는 제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분식집과 중식당, 향토음식점은 물론 고령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식당과 저소득층 여성 가장의 자활을 돕는 사업장까지 지원 대상도 다양해졌다.


올해로 출범 13년째를 맞은 맛제주 프로젝트는 현재까지 28개 식당의 재개장을 지원했으며, 지난 9월 29호점으로 제주시 외도동의 '외도이모네'를 선정했다. 외도이모네는 70대 여성 점주가 운영하는 소규모 한식당이다. 칼국수와 수제비, 닭한마리 전골 등을 판매하고 있지만 주거단지가 밀집한 지역에 위치해 관광객 방문이 적고 신규 고객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어왔다. 호텔신라는 오는 12월 재개장을 목표로 상권 및 고객층 분석, 신메뉴 개발, 시설 개보수, 마케팅 홍보 등을 단계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인사이트'맛있는 제주 만들기' 29호점으로 선정된 '외도이모네' / 사진 제공 = 호텔신라


주목할 점은 호텔신라의 지원이 식당 재개장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텔신라 셰프들은 재개장 이후에도 수시로 식당을 찾아 고객 반응과 식재료 관리 상태를 살피고, 운영 중 겪는 어려움에 조언을 건넨다. 제주에 태풍이나 폭설이 닥치면 식당 피해 여부부터 확인할 만큼 점주들과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호텔신라는 프로젝트 3주년과 5주년, 10주년을 맞을 때마다 참여 식당 점주들을 서울신라호텔과 제주신라호텔로 초청해 동행 행사를 열었다.


맛제주 프로젝트를 담당해 온 제주신라호텔 박영준 셰프는 "처음에는 셰프로서 신메뉴와 조리기술만 잘 전달하면 된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점주들과 오랜 기간 희로애락을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한 가족, 한 팀이 됐다"고 말했다.


식당을 새롭게 단장하는 단기적인 지원을 넘어 참여 점주들의 자발적인 나눔 활동으로 이어졌다. 개장 이후에도 사후관리를 이어가는 장기적인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 셈이다.


도움받던 주가 이웃 돕는 주체로... 나눔의 선순환


맛제주 프로젝트의 또 다른 성과는 도움을 받은 점주들이 다시 지역사회를 돕는 주체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점주들은 자발적으로 봉사모임을 결성해 지역 내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과 생필품 기부 등 나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5년에는 제주시 연동의 경로회관을 방문해 어르신 120여 명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제공했다. 2017년에는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쌀 125포대를 기증하고, 지역 어르신과 독거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맛있는 밥상' 봉사활동을 펼쳤다.


인사이트(왼쪽부터)맛제주 6호점 홍수정 점주, 17호점 김은정 점주, 손영준 제주특별자치도 자원봉사센터장, 1호점 박정미 점주, 3호점 남신자 점주 등 관계자가 지난 9월 22일 제주특별자치도 자원봉사센터에서 진행된 이불 기부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호텔신라


2018년에는 폭설과 한파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 143가정에 이불을 전달했다. 코로나19로 대면 봉사가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 2022년에는 지역아동센터 어린이 200여 명에게 쿠키와 학용품이 담긴 희망꾸러미를 전달했고, 2023년에도 소외 이웃을 위해 이불 100채를 기부했다.


특히 2023년 재개장한 26호점 '용담생국수' 점주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독거노인들에게 매월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등 자발적인 지역사회 공헌 활동을 실천해 왔다.


이 같은 활동은 맛제주 프로젝트가 단순한 영세 자영업자 지원 사업을 넘어 참여 점주들의 자발적인 나눔 활동으로 이어졌다.


기업의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자영업자가 다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주체로 나서는 구조다. 지원받는 사람과 지원하는 사람의 경계를 허물며 사회공헌의 고리를 이어 낸 것이다.


기업의 전문성이 곧 사회공헌 경쟁력... 지역 상생의 새로운 모델


맛제주 프로젝트는 호텔신라의 업(業)과 연계한 사회공헌 활동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호텔신라는 호텔 운영 과정에서 축적한 조리·서비스·시설 관리 역량을 활용해 지역 영세 식당의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이 가장 잘하는 일을 통해 지역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맛제주 프로젝트는 2015년 전국자원봉사자대회에서 기업 부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다른 지역의 벤치마킹 사례로도 이어졌다. 강원랜드 사회공헌재단은 폐광지역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정·태·영·삼 맛캐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호텔신라의 맛제주 운영 사례를 참고하고 자문을 받았다. 이는 호텔신라의 지역 상생 모델이 제주를 넘어 다른 지역에서도 활용 가능한 사회공헌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호텔신라 전경 / 인사이트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호텔신라 전경 / 인사이트


기업 입장에서도 지역사회와의 상생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주 지역 식당의 음식과 서비스 경쟁력이 높아지면 관광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고, 이는 관광지로서 제주가 가진 매력을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지역 상권이 힘을 얻으면 관광산업 발전으로 이어지고, 관광산업의 성장이 다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상승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기부금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고, 그 변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다. 호텔신라의 '맛있는 제주만들기'는 기업이 축적한 전문성을 지역사회와 나누는 사회공헌의 한 방향을 보여준다. 5성급 호텔의 레시피에서 시작된 지원은 영세 식당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일부 점주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으로도 이어졌다.


한 끼의 식사를 건네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군가가 자신의 힘으로 내일의 식탁을 차릴 수 있도록 돕는 것. 호텔신라가 13년째 제주 골목상권에서 이어가고 있는 상생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