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로 성장한 오리온이 바이오에 두 번째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다. 2024년 5485억원을 들여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 지분 25.73%를 확보하며 최대주주에 오른 데 이어 올해 1250억원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리가켐바이오가 추진한 5000억원 규모 자금 조달에 참여해 전환우선주 825억원과 전환사채 425억원을 인수한다.
제과에서 벌어들인 현금을 바이오라는 새로운 성장엔진에 배분하겠다는 구상이 실제 투자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바이오는 이제 오리온그룹 오너 3세인 담서원 부사장이 성과를 입증해야 할 핵심 신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오리온 신사옥 전경 / 사진 제공 = 오리온
지난해 말 부사장으로 승진한 담 부사장은 신설된 전략경영본부장을 맡아 그룹의 중장기 전략과 미래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2024년부터는 리가켐바이오 사내이사로도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6년 전 시작된 바이오 베팅... 리가켐 인수로 판 키웠다
오리온의 바이오 투자는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출발점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리온홀딩스는 2020년 10월 중국 국영 제약기업 산둥루캉의약과 바이오 사업 합자계약을 맺었다. 오리온홀딩스가 65%, 루캉이 35%를 투자하는 구조였다. 초기에는 암·감염성 질환 진단키트 등 체외진단 분야에서 출발해 중장기적으로 합성의약품과 신약 개발까지 영역을 넓히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당시 오리온이 내건 목표는 '글로벌 식품·헬스케어 기업'이었다. 이듬해 3월에는 합자법인 산둥루캉하오리요우 설립도 마쳤다.
리가켐바이오 사옥 / 리가켐바이오
전환점은 2024년이었다. 이전까지 바이오 사업이 국내 기술을 발굴해 중국 시장에서 상용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리가켐바이오 인수를 계기로 글로벌 신약 연구개발(R&D) 플랫폼을 처음 그룹 안으로 들였다.
오리온은 홍콩 계열사 팬오리온을 통해 리가켐바이오 신주와 구주 총 936만여주를 5485억원에 취득했다. 지분율은 25.73%다. 단순한 바이오 제품 사업을 넘어 글로벌 신약 개발사에 직접 자본을 투자하는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2026년 다시 125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외부 투자자 유입에 따른 지분 희석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리가켐바이오가 핵심 파이프라인의 임상 2·3상을 직접 수행하고 차세대 ADC 플랫폼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장기 연구개발 재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2020년의 바이오가 '진출'이었다면, 리가켐바이오 인수 이후의 행보는 바이오를 실제 그룹의 장기 성장축으로 키우는 단계에 가깝다.
제과로 번 현금, 바이오 성장엔진에 싣는다
오리온이 바이오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본업의 탄탄한 현금창출력이 있다. 오리온은 중국·베트남·러시아 등 해외 시장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실적을 이어왔다. 2025년 연결 기준 매출은 3조3324억원, 영업이익은 5582억원으로 전년보다 각각 7.3%, 2.7% 증가했다. 원재료 가격 상승과 고환율 등 비용 부담 속에서도 외형과 이익 모두 성장세를 이어간 것이다.
장기간 연구개발과 대규모 선투자가 필요한 바이오 사업을 감당할 수 있는 재무적 체력이 뒷받침되고 있는 셈이다.
오리온은 일찍부터 제과만으로 미래 성장을 이어가기보다는 간편대용식과 음료, 바이오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왔다. 바이오 사업에 진출할 당시에도 식품을 넘어 헬스케어로 사업 범위를 확장하겠다는 방향을 공식화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뉴스1
다만 시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의문이 제기됐다. '초코파이와 항암 신약이 대체 어떤 시너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 2024년 리가켐바이오 인수 발표 직후에는 식품회사가 바이오 기업을 인수하는 데 따른 사업적 시너지가 뚜렷하지 않은 데다, 신약 개발 특유의 높은 변동성이 오리온의 안정적인 현금 흐름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인수 발표 직후 오리온 주가가 큰 폭으로 조정받은 것도 이런 불확실성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이 때문에 오리온의 바이오 전략을 '식품과 바이오의 직접적인 시너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본업에서 창출한 현금을 활용해 식품 밖에 또 하나의 장기 성장축을 구축하려는 포트폴리오 전략에 가깝다.
왜 하필 리가켐이었나... 답은 ADC와 기술수출
그렇다면 수많은 바이오 기업 가운데 왜 리가켐바이오였을까. 핵심은 ADC다.
'ADC'는 암세포를 찾아가는 항체에 강력한 약물을 결합해 정상세포의 손상을 줄이면서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공격하도록 설계한 차세대 항암 기술이다. 리가켐바이오는 자체 ADC 플랫폼 '컨쥬올(ConjuAll)'을 기반으로 다수의 후보물질을 개발해온 국내 대표 ADC 기업이다.
무엇보다 오리온이 지분을 인수할 당시 리가켐바이오는 가능성만 가진 초기 단계 기업이 아니었다. 이미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굵직한 기술수출 실적을 확보하고 있었다.
리가켐바이오는 2023년 12월 얀센바이오텍에 ADC 후보물질 LCB84의 글로벌 개발·상용화 권리를 최대 17억달러, 당시 환율 기준 약 2조2400억원 규모로 기술이전했다. 2024년에는 일본 오노약품공업과 LCB97 및 ADC 플랫폼 관련 계약도 체결했다. 오리온이 현재 소개하는 리가켐바이오의 누적 기술이전 계약 규모는 약 10조원이다.
파이프라인의 개발 단계도 진전되고 있다. 얀센에 기술이전한 LCB84는 현재 글로벌 임상 1·2상이 진행 중이며, 올해 하반기 일부 고형암을 대상으로 임상 2상 용량확장 단계에 진입할 예정이다. 오노약품에 이전한 LCB97 역시 올해 일본에서 절제 불가능한 진행성·재발성 고형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1상에 들어갔다.
오리온 입장에서는 제로베이스에서 제약사를 만들고 연구진을 꾸려 신약 개발에 나서는 것보다 이미 기술력과 연구조직, 글로벌 기술이전 경험을 갖춘 플랫폼 기업의 최대주주가 되는 편이 바이오 진입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인수 이후 접근 방식도 '과자회사가 직접 신약을 개발한다'는 그림과는 거리가 있다. 오리온 측 인사들이 이사회에 참여하되 리가켐바이오의 기존 연구개발 역량과 경영 전문성을 유지하는 구조다. 담 부사장 역시 인수 이후 사내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하며 바이오 사업 경험을 쌓아왔다.
결국 오리온의 바이오 전략은 '과자회사가 신약을 만든다'기보다 '과자로 번 현금을 검증된 신약 플랫폼에 배분한다'는 표현에 더 가깝다.
3세 경영 시험대... 이제는 투자보다 성과
이 전략의 성패는 담서원 부사장의 경영 성과와도 점점 맞닿고 있다. 담 부사장은 2021년 7월 오리온에 수석부장으로 입사한 뒤 2022년 말 상무, 2024년 말 전무를 거쳐 2025년 12월 부사장에 올랐다. 입사 후 약 4년5개월 만이다. 현재는 전략경영본부장으로 신규사업과 해외사업, 경영지원 등을 아우르며 그룹의 중장기 전략과 미래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빠른 승진으로 '3세 경영'의 존재감은 이미 뚜렷해졌다. 이제 관건은 직급이 아니라 성과다. 바이오는 이를 확인하기에 쉽지 않은 시험대이기도 하다.
오리온 담서원 부사장 / 사진 제공 = 오리온
신약 산업은 투자 시점과 성과가 나타나는 시점 사이에 수년의 시차가 있다. 후보물질이 임상 후기 단계로 갈수록 필요한 비용도 커진다. 리가켐바이오는 파이프라인 확대와 임상 진행으로 연구개발비가 늘면서 2025년 연결 기준 매출이 1416억원으로 증가했음에도 영업손실은 1065억원으로 확대됐다.
반면 성과가 현실화될 경우 레버리지는 크다. 하나의 기술이전 계약이 조 단위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고, 후보물질의 임상 진전과 상업화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플랫폼 자체의 가치도 커질 수 있다.
결국 이번 1250억원 추가 투자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의 시작이다. 리가켐바이오가 확보한 자금을 얼마나 가치 있는 파이프라인과 기술이전 성과로 바꿔낼 수 있을지, 오리온이 본업의 현금창출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바이오 투자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앞선 세대가 초코파이를 앞세워 중국과 베트남, 러시아 등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면 담 부사장이 받아든 과제는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성장축을 세우는 일이다.
오리온이 2020년 내건 '글로벌 식품·헬스케어 기업' 구상이 리가켐바이오를 통해 실제 두 번째 성장엔진으로 자리 잡을지, 아니면 본업과 거리가 먼 고비용 투자로 남을지 판단할 기준도 이제 투자 규모가 아니라 성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