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빨간 뚜껑 소주'를 곁들이며 요리 철학을 논하던 최강록 셰프의 모습은 2030 세대에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했습니다.
미식의 정점에서 결국 가장 투박하고 술 한 잔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모습, 우리는 거기서 꾸며내지 않은 '진짜'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역사 속 영웅 이순신에게도 이와 닮은 풍경이 있었습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
성웅(聖雄)이라는 거창한 박제 뒤에 가려진, 전쟁이라는 비릿한 고통을 독한 술 한 잔으로 잠재우던 '인간 이순신'의 페이소스 가득한 술상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이순신은 흔들림 없는 강철의 화신이지만, 그의 내밀한 고백인 '난중일기' 속에는 술에 기대어 하루를 버텨낸 한 인간의 고독이 고스란히 박혀 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다. 홀로 빈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1596년 1월 3일)"
"저녁에 소주를 마시는데 취하여 촛불을 켠 채로 잠들었다(1593년 7월 6일)"
여기서 등장하는 '소주'는 지금의 희석식 소주와는 궤를 달리하는 고도수의 증류주, 즉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불(火)이었습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된 이미지
살을 에이는 밤바다의 추위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조정의 압박 속에서, 장군에게 소주는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덜어주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던 셈입니다.
장군의 술상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늘 사람이 머물렀습니다.
"여러 장수들과 술을 마시며 밤 깊도록 이야기했다(1595년 5월 1일)"는 기록처럼,그는 큰 전투를 앞두거나 마친 뒤 술잔을 매개로 부하들과 속내를 나누곤 했습니다.
장군은 마른 생선, 어물(魚物), 생선, 젓갈류 등 해산물을 곁들여 병사들과 술을 나누며 고단함을 덜어주곤 했습니다.
촛불 아래서 취해 잠들 정도로 고단했던 리더의 밤은, 역설적으로 다음 날 적진을 향해 나갈 용기를 충전하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빨간 뚜껑 소주 한 병을 집어 드는 우리의 손길은, 430년 전 촛불을 켜고 술잔을 기울이던 장군의 마음과 어딘가 닮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라는 거대한 전쟁터에서 치열한 하루를 보낸 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안의 고독을 독한 술 한 잔으로 정화하는 행위는 시간을 뛰어넘어 공명합니다.
술은 때로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이순신과 최강록의 사례처럼 때로는 가장 정직하게 나 자신을 마주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밤, 유난히 고단한 하루를 보냈다면 장군의 술상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기교 없는 정공법으로 세상을 상대하고, 묵직한 술 한 잔으로 하루의 먼지를 털어내던 그 '곤조' 있는 태도를 말입니다.
촛불을 켠 채 취해 잠들지언정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장군처럼, 당신이 들이켜는 그 술잔은 내일의 전장으로 다시 나갈 나 자신을 향한 가장 뜨거운 위로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