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미인도' 진위 논란, 유족의 국가배상소송 최종 패소
대한민국 미술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천 화백의 딸인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에서 최종 패소가 확정됐기 때문입니다.
고(故) 천경자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가 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천경자 코드' 출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7.7.20 / 뉴스1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박영재 대법관)는 지난 4일, 김정희 교수가 국가를 상대로 1억 원의 배상을 청구한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의 원고 패소 판결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습니다.
이로써 하급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형사 사건을 제외한 소송에서 2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 등 잘못이 없다고 보고 본격적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입니다.
위작(僞作)논란이 있던 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2017년 4월 18일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 뉴스1
30년 넘게 이어진 '미인도' 진위 논란
'미인도' 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 작품을 '움직이는 미술관' 순회전에 포함시켜 공개하면서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1977년 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원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10·26 사태로 김 전 부장의 재산이 압수되면서 정부 소유가 되었고, 198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나.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진품이라고 맞섰고, 전문가들도 진품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결국 천 화백은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장 페니코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광학연구소 소장이 27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위작 미인도사건, 프랑스 감정팀 기자회견에서 검찰발표에 대한 반박 및 감정보고서를 설명하고 있다. 뤼미에르측은 미인도를 위작으로 판정하기까지 실시한 철저한 과학감정의 과정, 1650개 단층 심층촬영 분석, 고 천경자 화백의 진품과 미인도의 과학적 비교 등 감정과 판단의 증거 등 과학적 검증 과정을 통해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2016.12.27 / 뉴스1
진위 공방이 본격화된 계기는 2015년 천 화백의 별세였습니다.
김 교수는 프랑스 뤼미에르 광학연구소에 작품 감정을 의뢰해 2015년 11월 해당 작품이 진품일 확률이 '0.00002%'라는 결과를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김 교수는 2016년 4월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이 '미인도'가 진품이 아닌데도 진품이라고 주장해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사자명예훼손 및 허위공문서 작성·행사,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고발했습니다.
이에 서울중앙지검은 2016년 8개월여의 조사 끝에 전문기관의 과학감정, 전문가 안목 감정, 미술계 자문 등을 종합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X선·원적외선·컴퓨터 영상분석·DNA 분석 등 과학감정 기법을 동원해 천 화백 특유의 작품 제작 방법이 '미인도'에 그대로 구현됐다고 판단했습니다.
YTN
그러자 김정희 교수는 2017년 '미인도'가 위작임을 입증하는 근거를 정리한 책 '천경자 코드'를 출간하며 "천 화백의 다른 작품에 있는 코드가 없으므로 명백한 위작"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김 교수는 2019년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검사의 성실·객관 의무 위반 부실 수사 등을 문제 삼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 법원은 2023년 7월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수사기관이 성실의무를 위반했다거나 객관적 정당성을 잃는 등 불법행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2심 역시 지난 4월 "검찰 수사 과정에 다소 미흡한 과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수사가 위법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2심은 검찰의 수사 과정과 그 결론의 위법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수사 결과 발표 역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유족 측이 재차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기각하면서 판결이 최종 확정됐습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다만, 법원이 '미인도'의 진위에 대해 진품 또는 위작으로 보인다는 판단을 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국가배상 소송에서는 패소했지만, '미인도' 위작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김 교수는 국가배상 소송 과정에서 검찰이 감정위원으로부터 받은 감정서에 대해 문서송부촉탁을 신청했는데, 검찰이 이를 거부하자 지난해 5월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검찰이 수사 기록을 공개해야 한다며 김 교수의 손을 들어준 법원 판결이 지난달 확정됐습니다.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감정서 공개 판결이 확정된 것입니다.
30년이 넘게 이어진 '미인도' 진위 논란은 이번 국가배상 소송의 패소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감정서 공개 소송의 승소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공개될 감정서의 내용에 따라 '미인도'의 진위 논란은 또 다른 전개를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 미술사의 거장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둘러싼 이 논쟁이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 미술계와 법조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