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 오늘, 역사를 바꾼 판결
1991년 8월 26일, 대한민국 법정에서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계획적으로 한 남성을 살해한 여성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인데요. "나는 짐승을 죽였어요"라는 말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김부남 사건'의 판결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닌, 아동 성폭력의 심각성과 그 후유증을 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을 '처벌'하기보다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렸는데, 그 배경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21년간 이어진 끔찍한 트라우마
KBS2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
사건은 1991년 1월 30일, 전라북도 남원군(현재 남원시) 주천면의 한 마을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30세였던 김부남 씨가 이웃집 남성 송백권(당시 55세)을 미리 준비한 흉기로 찔러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범행을 순순히 인정한 김부남 씨는 "당연하게 할 일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짜 시작은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0년, 9살이었던 김씨는 동네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던 중 이웃집 아저씨 송백권에게 유인되어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어린 소녀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말하면 가족 모두가 죽는다"는 송씨의 협박에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김씨는 성인이 되어 결혼했지만, 망상과 불안장애 등 심각한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KBS2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
TV에서 자신이나 남편이 말을 건다고 착각해 TV를 부수거나, 이웃들이 자신을 욕한다고 생각해 싸우는 등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법의 한계와 사적 복수
김씨는 자신의 모든 문제가 어린 시절 당한 성폭행 때문임을 깨닫고 송씨를 고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범죄는 친고죄로 고소 기간이 6개월이었고, 이미 공소시효도 지난 상태였습니다.
법적으로는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김씨는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가죽 손가방을 이용해 직접 허리띠와 칼집을 만들어 부엌용 칼과 과도를 준비했고, 거울을 보며 흉기를 빠르게 꺼내는 동작을 연습하는 등 범행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KBS2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
1991년 1월 30일, 김씨는 송씨를 찾아가 할 얘기가 있다며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고, 송씨가 오히려 욕설을 내뱉자 그에게 달려들어 준비한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당시 송씨는 중풍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불편한 상태였기에 김씨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김씨는 혼란 속에 부엌용 칼을 빼앗기자 즉시 과도를 꺼내 송씨의 낭심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결국 살해했습니다.
"나는 짐승을 죽였어요" - 법정에 울려 퍼진 절규
KBS2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
지난해 3월 6일 방송된 KBS 2TV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에서는 김부남 사건을 담당했던 서태영 전 판사가 방송에 최초로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습니다.
법정에 선 김씨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리고 가냘픈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서 전 판사는 "1심 공판을 마칠 무렵 '할 말 있나' 묻자, 김부남은 '나는 짐승을 죽였어요'라고 대답했다"며 "그 말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절규로 들렸다"고 회상했습니다.
실제로 김씨는 1심 3차 공판에서 판사의 질문에 작은 목소리로 답했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듣지 못한 판사가 변호인에게 물었고, 변호인이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습니다"라고 대신 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동 성폭행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상징적인 문구가 되었습니다.
1991년 8월 26일, 1심 재판부는 김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치료감호'라는 이례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계획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실형을 선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KBS2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
서 전 판사는 "순박한 소녀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성폭행을 당한 탓에 심신이 파탄돼서 살인자가 되었으니 피고인에겐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다"며 "재판부로서는 피고인에 대해 어떻게 처벌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느냐를 고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김씨의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그녀는 약 1년 7개월간 공주 치료감호소(현 국립법무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1993년 5월 1일 석방되었습니다.
김부남 사건은 1년 후 발생한 김보은·김진관 사건과 함께 성폭력 특별법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KBS2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
이 사건은 34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법의 한계, 아동 성범죄의 심각성, 그리고 피해자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트라우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김부남 씨의 "나는 짐승을 죽였어요"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