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신 사람과의 관계, 생물학적 노화 촉진시킨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데요.
그중에서도 걱정이나 불안, 괴로움을 안겨주는 부정적 관계가 단순히 정서적 스트레스를 넘어 실제 생물학적 노화까지 촉진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JTBC '나의 해방일지'
뉴욕대 이병규 교수(사회학)가 이끄는 미국 연구진은 인디애나주 성인 222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상에서 괴롭히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성가신 사람'이 생물학적 노화를 가속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연구진은 이러한 사람들을 '해슬러(hassler)'라고 명명했는데요, 우리말로는 '성가신 사람' 또는 '스트레스 유발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의 타액을 수집해 DNA 메틸화(DNAm)를 측정하는 후성유전학적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DNA 메틸화는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후성유전물질로, 노화 정도를 판별하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이와 함께 지난 6개월간 밀접하게 교류한 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설문조사도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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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결과, 성가신 관계에 있는 1인은 평균적으로 생물학적 노화 속도를 0.5%씩 촉진시키고, 생물학적 연령은 2.5개월 더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비흡연자와 흡연 경험자(현재는 금연 중인 사람)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와 유사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관계의 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밀접하게 교류하는 4명 중 1명은 괴로움을 주는 '성가신 사람'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응답자의 약 60%는 적어도 1명 이상의 '성가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 관계가 노화를 촉진하는 메커니즘은 스트레스 호르몬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가신 사람과의 관계는 코르티솔, 아드레날린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방출을 유발하고, 이것이 누적되면 염증 반응과 DNA 메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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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성가신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전체 관계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노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평소 교류 네트워크의 절반 이상이 '성가신 사람'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노화와의 연관성이 가장 뚜렷했습니다.
또한 성가신 사람은 전반적인 건강 상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가신 사람의 비율이 높은 응답자들은 건강 상태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불안과 우울 점수도 높았습니다.
양가적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번 연구에서 더욱 흥미로운 발견은 순전히 부정적인 관계보다 긍정과 부정 감정을 함께 주는 '양가적 관계'(Ambivalent Ties)가 노화에 더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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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교수는 "순전히 부정적 관계에 있는 사람은 관계의 강도가 약해 거리를 두거나 심리적으로 떨쳐버릴 수 있지만, 양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응답자뿐만 아니라 응답자의 다른 지인들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어 쉽게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양가적 관계는 주로 가족 구성원이나 오랜 친구처럼 정서적 유대나 사회적 의무로 인해 관계를 끊기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발견됩니다.
이 교수는 특히 '정'을 중시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정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관계를 끊지 못하고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대 알렉스 해슬램 교수는 이번 연구에 대해 "같은 문제를 살펴본 다른 연구들과 일치하는 결과"라면서도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개인보다 노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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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교수는 성가신 관계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슬러는 누구에게나 흔히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자각한 뒤, 경계선을 설정하거나 감정 반응을 조절하는 등의 대응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또한 "자원봉사, 취미 활동, 지역 커뮤니티 모임 등을 통해 지지적이고 갈등이 적은 사람들과의 새로운 긍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이번 연구는 성가신 사람과 노화의 상관관계를 확인한 것이지 인과관계를 규명한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교수는 현재 DNA 메틸화 패턴이 해슬러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는 후속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