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의 새로운 도전, 소리를 디자인하다
전기차는 흔히 '모범생'에 비유됩니다. 매연 없이 조용하고 매끄럽게 달리는 모습은 친환경성과 뛰어난 주행 성능을 동시에 보여주며 미래 자동차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범생에게도 의외의 약점이 있는데요, 바로 '소리'입니다.
전기차는 본질적으로 조용합니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회전하전 파워트레인 때문에 실내로 전해지는 소음과 진동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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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노면 소음이나 풍절음이 더욱 부각되거나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낯선 조용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행 몰입을 방해하거나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러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전기차 전용 '가상 사운드 기술' 개발에 나섰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전기차의 '엔진음을 만들어내는 'e-ASD(전기차 액티브 사운드 디자인)' 기술입니다.
전기차에 소리가 필요한 이유
전통적인 내연기관 자동차는 소리를 통해 주행 정보를 직관적으로 전달합니다. 운전자는 엔진의 회전수 변화에 따라 속도, 가속, 감속 상태를 청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죠.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 / ChatGPT
반면 전기차는 모터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청각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소리가 없다 보니 주행 정보가 느껴지지 않고, 감성적 몰입도도 떨어지게 됩니다.
또한 전기차는 보행자에게도 '들리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실제로 전기차가 뒤따라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 놀라는 경험은 흔하게 발생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국내외에서는 '가상 엔진 사운드 시스템(Virtual Engine Sound System, VESS)'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는데요. 외부에 인위적인 소리를 내어 전기차의 존재를 알리는 장치입니다.
e-ASD: 조용한 차 안에 '경험'을 설계하다
현대차그룹은 단순한 경고음을 넘어서 '전기차다운 주행 사운드'를 디자인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e-ASD인데요. 이는 단순한 소리 재현을 넘어, 탑승자의 감성까지 고려한 복합적 기술입니다.
현대차 홈페이지
e-ASD의 핵심은 '그래뉼라 신디시스(Granular Synthesis)'라는 신호처리 방식에 있습니다.
전자음악 분야에서 사용되는 이 기술은 소리를 매우 작은 입자 단위로 나눈 뒤 재조합해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디제이가 여러 곡을 믹싱하듯, 주행 속도, 가속, 부하 등 차량의 실시간 신호를 기반으로 새로운 소리를 설계하는 것이죠.
이 기술을 통해 고성능 스포츠카처럼 웅장한 엔진음을 구현할 수도 있고, 우주선이 날아가는 듯한 미래형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전기차가 제공하는 조용함에 '개성'과 '감성'을 더한 셈입니다.
나라별, 사람별로 다른 '좋아하는 소리'
현대차 홈페이지
사운드는 매우 주관적인 영역입니다.
현대차그룹 사운드디자인리서치랩은 e-ASD 개발을 위해 수백 가지 가상의 사운드를 만들어 실험했는데요. 전 세계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진행한 결과는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유럽 고객들은 '내연기관에 가까운' 사운드에 높은 호감을 보였습니다. 반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고객들은 '미래지향적이고 신선한' 전기차 고유의 소리에 더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기아 EV6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요.
EV6에는 ▲스타일리시(세련되고 친숙한 전기차 사운드), ▲다이내믹(역동적인 엔진 사운드 재해석), ▲사이버(미래형 전자 사운드) 등 3가지 테마 사운드가 탑재되어, 운전자가 직접 취향에 맞춰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쟁사 전기차들이 한 가지 테마만 적용한 것과는 확실한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V6에 구현된 e-ASD 사운드 테마 3가지 / 현대차 홈페이지
소리도 '맞춤형' 시대, 감성을 설계하는 e-ASD
e-ASD는 단순히 소리를 재생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주행 환경, 가속 페달 입력량, 운전자의 성향까지 실시간으로 분석해 음량과 음색을 최적화합니다.
심지어 사용자가 '사운드 반응 속도'도 조절할 수 있는데요. 빠른 피드백을 원하면 가속 페달에 따라 음색이 즉각적으로 바뀌고, 느리게 설정하면 보다 차분한 주행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운전자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로부터 '속도감'을 느끼고 '운전의 리듬'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는 시각이나 촉각에 의존하지 않고도 운전 몰입도를 높여주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연기관 시대에는 '소음을 줄이는 것'이 기술의 중심이었다면, 전기차 시대의 사운드는 '경험을 만드는 것'으로 진화했습니다.
조용한 것이 당연한 전기차에 일부러 소리를 더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감성, 몰입, 안전까지 고려한 총체적 운전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차그룹의 e-ASD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전기차가 소리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앞으로의 전기차는 '조용한 차'가 아니라, '조용함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들려주는 차'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