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7월부터 특별전에서 애국지사의 작품으로 전시한 서예가 친일파의 글씨로 밝혀졌다.
지난 7일 박물관은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 전시된 서예 작품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에 대한 전문가 조사 결과, 박중양의 글씨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박물관은 애초 이 작품을 독립운동가 박원근의 유묵으로 전시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유가족이 전시실에서 무릎 꿇고 통곡하는 모습이 알려지며 사회적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개막 한 달여 만인 지난달 10일 작품의 낙관(落款)에 새겨진 '박원근'이 박중양의 다른 이름이라는 외부 제보가 접수됐고, 박물관은 즉시 작품을 철거했다.
박물관은 이후 서예·근현대사·고문헌·보존과학 분야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분야별 검증 작업을 진행했다.
조사단은 '일반시국은' 유묵과 박중양의 기존 필적을 비교 분석한 결과, 획 처리 방식에서 유사한 특징을 발견했다. 박물관 측은 "박중양의 필적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에 찍힌 인장도 박중양과의 연관성을 뒷받침했다. 유묵 상단에 찍힌 두인(頭印)은 1932년 말 서예가 김태석(1874~1951)이 박중양에게 새겨준 것으로 알려진 인장의 문구와 일치했다.
박물관은 "유묵에 사용된 '한인(韓人)'이라는 표현은 대한제국 시기 일본으로 유학 간 학생이나 방문자들이 주로 쓰던 용어"라며 "박원근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체류 기록이 없는 반면, 박중양은 대한제국기인 1896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 유학 경력이 있어 시기적 정황과 부합한다"고 밝혔다.
조사 과정에서 일본 등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박원근' 명의로 유통된 서예 작품들도 발견됐다.
박물관은 "이들 작품 중 상당수가 '일반시국은'과 동일한 글씨체와 인장을 사용했으며, 일본인을 위해 쓴 작품도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다.
박물관 측은 "지하 조직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독립운동가 박원근이 해외 유통될 만큼 다수의 서예 작품을 남기고 일본인을 위해 글씨를 썼다는 것은 그의 생애와 맞지 않는다"며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의 유묵임을 입증하는 근거"라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로 박물관의 전시 작품 검증 절차가 부실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외부 제보를 통해 한 달이 지나서야 문제를 인지했다는 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유홍준 관장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은 박물관이 국민 앞에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인데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박물관은 "박원근 지사의 유가족에게 조사 경위와 결과를 설명하고 거듭 사과할 예정"이라며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사전 검증 체계를 대폭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유홍준 관장은 "유가족과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며 "앞으로 전시품 검증 절차를 더욱 철저히 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