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 연구개발(R&D) 직군의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을 위해 국회 입법이 아닌 행정지침 개정에 나선다. 현행 3개월로 제한된 '주 64시간 특별연장근로' 기간을 6개월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여야 대립으로 반도체특별법 입법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정부가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행정조치를 우선 시행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에선 실질적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라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11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부는 특별연장근로를 포함한 근로시간 유연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행정지침 개정을 추진 중이다.
특별연장근로는 근로자의 동의와 고용부 장관의 인가를 거쳐 주 64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연구개발을 사유로 최대 3개월까지 1회 인가가 가능하며, 3회 연장을 통해 최대 12개월까지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 제도가 현실적으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별연장근로는 불가피한 사유, 노사 합의, 고용부 승인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해 실제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만약 기업들이 이를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정부는 1회 최대 인가 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업들이 6개월간 연장근로를 활용한 뒤, 추가로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국민의힘이 반도체특별법과 관련해 제시한 절충안과도 맞닿아 있다.
김문수 고용부 장관은 이날 경기 성남 판교 동진쎄미켐 R&D센터에서 열린 '반도체 연구개발 근로시간 개선 간담회'에서 "현행 3개월 단위 인가는 R&D 성과를 내기엔 너무 짧다"며 "6개월 정도면 기업들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고 밝혔다.
이어 "입법을 통한 근로시간 개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행정지침 개정은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도 특별연장근로 활용 확대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최근 최고위원회의에서 "주 52시간제 예외가 불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특별연장근로 제도"라며 이를 활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경영계 반응은 미온적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법 개정이 아니라 행정조치를 손보는 수준에서는 여전히 정부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하려면 '왜 업무량이 증가했는지'부터 '연장근로가 불가피한 사유'까지 일일이 서류로 증명해야 하는데, 이 부담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업이 겪는 어려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정부가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현재 '주 단위'에서 '월 단위' 또는 '분기 단위'로 확대하는 방안은 검토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위 변경은 노동계 반발과 민주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문제라 정부가 쉽게 추진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준혁 동진쎄미켐 부회장은 "반도체 산업은 납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한데, 현행 근로시간 규제가 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안태혁 원익IPS 대표이사는 "반도체 개발은 속도가 핵심"이라며 "특정 시기에 집중 근무가 필요한 경우가 많으므로 최소 6개월 정도는 노사 합의를 통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반도체 산업은 기술 전쟁이고, 기술 전쟁은 결국 시간 싸움"이라며 "미국·일본·대만이 국운을 걸고 반도체 생태계를 육성하는 동안, 우리나라만 근로시간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