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도카이무라 원전 사고...엄청난 양 방사는 피폭
히사시 오우치 / YouTube 'Peaked Interest'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청년이 있다. 바로 도카이무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던 히사시 오우치다.
10일(현지 시간) 영국 매체 미러 등은 오우치의 삶을 재조명했다. 오우치는 도카이무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동료 마사토 시노하라, 유타카 요코가와와 함께 우라늄 질산 용액을 커다란 금속 통에 혼합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도카이무라 원자력 발전소는 당시 새로운 공정 간소화 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오우치는 위험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자동 펌프 대신 손으로 작업을 하게됐다.
그러던 1999년 9월 30일, 계산 착오로 인해 제한량보다 13.6kg이나 많은 16kg의 우라늄을 사용하게 됐다. 푸른 섬광과 함께 엄청난 양의 방사선과 감마선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말았다.
YouTube 'Peaked Interest'
가장 멀리 있던 요코가와는 3,000 밀리시버트(mSv), 시노하라는 10,000mSv, 탱크 바로 옆에 있던 오우치는 무려 17,000mSv를 흡수했다. 연간 20mSv 이상의 방사선 노출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5,000mSv는 치사량으로 여겨진다.
악명 높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긴급 구조대원들이 흡수한 방사선량은 20~500mSv에 불과했다. 물론 이 역시 위험한 수치이지만 도카이무라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오우치는 도쿄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 극심한 고통 속에서 83일 동안 생명을 유지했다. 마치 장기가 불타는 듯한 고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피부는 방사선으로 인해 천천히 벗겨졌고 신체 조직이 죽으면서 눈꺼풀이 떨어져 나갔다. 벗겨진 피부에서는 체액이 흘러나왔다. 의료진은 피부 이식과 줄기 세포 이식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히사시 오우치 / YouTube 'Peaked Interest'
폐에도 체액이 쌓여 호흡이 불가능해졌고, 음식과 약물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 세포도 죽어 끔찍한 복통과 매일 3리터의 설사를 했다. 내부 출혈로 인해 하루에도 10번의 수혈을 받았다고 한다.
오우치는 통증이 너무 심해 의료진에게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 병원에 입원한 지 59일째에 심장이 멈췄지만 세 번이나 소생됐다.
오우치는 결국 1999년 12월 31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기록상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가 됐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2000년 4월, 시노하라 역시 40세의 나이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요코카와는 병원에 입원했지만 3개월 후 경미한 방사선 질환으로 퇴원했다.
히사시 오우치 / YouTube 'Peaked Interest'
오우치의 비극적인 삶은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 운영 방식을 바꾸어버렸다.
일본에서는 원자력 안전 규정이 개정되어 보호 장비 착용이 의무화됐다. 또한 전국 시설에서 작업자 교육이 우선시됐다. 이전에는 많은 작업자들이 핵 물질 취급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엄격한 안전 프로토콜도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자동화 시스템 도입, 수동 작업 배제 등이 포함되어 더 이상 인적 오류가 사고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했다.
사고 이후 신속한 비상 대응 계획도 수립되었다. 각 시설은 비상 절차를 갱신하고 여기에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한 대피 계획과 훈련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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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원자력 안전 위원회는 규제 기관의 검토 및 재구조화를 거쳐 안전 기준을 시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향후 사고 발생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핵 물질 사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법률도 제정됐다.
다른 국가들도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여 안전 프로토콜을 개정, 국제 규제 기관들은 도카이무라 사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침을 개선했다.
과학계는 원자력 산업 안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이후 방사선 노출에 대한 과학적 연구, 치료법 개발, 기술 개선 등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