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십대 소년이 무릎 수술을 받은 후 모국어를 잊고 영어로만 말하는 기이한 의료 사례가 전해졌다.
지난 19일(현지 시간) 미국 과학 전문 매체 라이브사이언스(LiveScience)의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17세 소년 A군은 축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해 무릎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아 났지만, 마취에서 깨어난 A군은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영어만 말했으며 자신이 미국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부모도 알아보지 못했다.
특이한 점은 소년이 학교에서 배우긴 했지만,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용해 본 적 없는 영어로 의사소통했다는 것이다.
의료진이 A군의 사례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년은 정신과적 증상의 병력이 없었고 가족 중 어머니 쪽에서 우울증이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련 의학적 가족력이 없었다.
처음 A군이 영어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간호사는 마취에서 회복하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혼란 상태인 '각성 섬망(Emergence delirium)'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료진은 몇 시간 후에도 A군이 네덜란드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자 정신과 상담을 요청했다.
수술 후 약 18시간이 지난 시점에 진행된 정신 상태 검사에서 소년은 네덜란드 억양이 있는 영어로만 대화했다.
의사들은 "그의 영어 사용은 적절해 보였으며 발음과 억양도 명확했다"고 기록했다.
얼마 후 A군은 네덜란드어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어려워했다.
의료진은 이 증상을 '외국어 증후군(Foreign Language Syndrome, FLS)'으로 진단했다. 이는 환자가 모국어에서 벗어나 일정 기간 동안 제2외국어에 집착하는 현상을 말한다.
흥미롭게도 수술 후 약 24시간이 지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을 때, 소년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어를 다시 이해하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다음 날 검사에서 소년은 수술 직후 자신이 영어만 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부모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이 미국에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다행히 소년은 무사히 회복한 후 수술 3일 만에 퇴원했다.
의사들은 "외국어 증후군의 정확한 병태생리는 아직 불분명하다"며 "마취가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이 있지만, 마취의 구체적인 영향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사례는 '의학 사례 보고 저널(Journal of Medical Case Reports)'에 게재됐다.
의료진은 이 사례가 청소년의 FLS를 공식적으로 문서화한 최초의 사례라고 밝혔다.
의학계에서는 이와 유사한 FLS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단 9건만 보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환자는 백인 남성이었으며, 모국어를 잊고 나중에 배운 다른 언어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중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다.
이 증후군이 독립적인 질환인지 아니면 섬망의 한 형태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희귀 질환으로는 '외국어 말투 증후군(Foreign accent syndrome, FAS) '이 있다.
지난달 영국 런던 출신 알시아 브라이든(Althia Bryden, 58)이라는 여성은 ITV '디스 모닝(This Morning)'에 출연해 지난해 뇌졸중을 앓고 수술을 받은 후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음에도 이탈리아 억양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대화에 이탈리아어 문구를 섞어 사용하는 증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뉴캐슬 대학교의 신경과학 전문가 닉 밀러(Nick Miller) 교수는 더선(The Sun)에 "뇌졸중이 언어를 제어하는 뇌 부위에 영향을 미치면 혀, 입술, 성대 등의 움직임이 변화해 말소리가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변화가 발음과 리듬에 영향을 미쳐 외국 억양처럼 들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계는 이러한 희귀 언어 관련 증후군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뇌와 언어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신경과학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