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록음악의 전설, 비치보이스 리더 브라이언 윌슨 별세
미국 록음악계의 거장이자 비치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지난 11일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1일(현지 시간)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윌슨의 가족은 그의 공식 웹사이트와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린 성명을 통해 윌슨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렸다.
1960년대 영국의 비틀즈와 함께 세계 음악계를 양분했던 비치보이스는 캘리포니아의 작은 지역 밴드에서 출발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전설적인 록밴드로 성장했다.
윌슨은 록 음악계의 위대한 낭만주의자 중 한 명으로, 완벽한 사운드를 향한 고뇌에 찬 여정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비치보이스는 록 시대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자리매김하며 30곡 이상의 싱글이 톱 40에 진입했고, 전 세계 앨범 판매량은 1억 장을 넘어섰다.
윌슨의 사촌 마이크 러브와 어린 시절 친구 앨 자딘이 함께 활동했던 이 밴드는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음악적 영향력과 독보적인 창작 세계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비치보이스의 앨범 'Pet Sounds'가 비틀즈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으며, 발라드 'God Only Knows'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로 꼽았다.
윌슨의 음악적 영향력은 히트곡이 끊긴 후에도 오랫동안 팬들과 후배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윌슨과 헌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함께 콘서트홀에서 'Pet Sounds'와 복원작 'Smile'을 연주하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고고스, 린지 버킹엄, 애니멀 콜렉티브, 자넬 모네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팝 음악의 창조 거장이자 혁신가로서의 윌슨을 모방하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계승했다.
키가 크고 수줍음이 많았던 윌슨은 아버지 머리 윌슨에게 구타당한 탓에 부분적인 청각 장애를 갖고 있었다.
밴드 이름과 달리 그는 실제로 서핑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캘리포니아의 라이프스타일과 척 베리, 포 프레시맨 같은 음악적 영향을 바탕으로 시간과 기후를 초월해 울려 퍼지는 황금빛 사운드스케이프를 창조해냈다.
비치보이스의 탄생과 성장
윌슨은 1942년 6월 20일, 폴 매카트니보다 이틀 늦게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인 그는 피아노를 치고 형들에게 화음을 가르치며 음악적 소질을 발휘했다. 비치보이스는 윌슨의 침실과 캘리포니아 교외 호손에 있는 집 차고에서 연습하는 동네 밴드로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주로 기악 연주로 이루어진 서프 음악이 지역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밴드의 유일한 서퍼였던 데니스 윌슨의 제안으로 브라이언과 마이크 러브는 첫 싱글 'Surfin'을 작곡했고 1961년에 마이너 히트를 기록했다.
그들은 초기 홍보 사진에서 입었던 인기 플란넬 셔츠를 기념해 '펜들톤스(Pendletones)'라는 이름을 원했지만, 음반사의 결정으로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 삶과 마지막 여정
윌슨의 첫 결혼은 가수 마릴린 로벨과의 이혼으로 끝났고, 두 딸 카니와 웬디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나 1995년 멀린다 레드베터와의 결혼으로 그의 삶은 안정을 찾았다.
노년에는 치매를 앓았으며, 지난해 아내 멀린다가 사망한 이후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윌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음악계 인사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밥 딜런은 "오늘 브라이언에 대한 슬픈 소식을 듣고,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브라이언, 편히 쉬세요"라고 X(옛 트위터)에 올렸다.
비치보이스 창립 멤버 앨 자딘은 "친구이자 반 친구, 풋볼 팀 동료, 비치 보이스 밴드 동료이자 제 영혼의 형제여, 당신이 우리 삶 속에 오랫동안 함께해 준 것에 항상 감사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4년 영화 '러브 앤 머시'에서 윌슨 역을 맡은 존 쿠삭은 "거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두 다리가 달린 열린 마음과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추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