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판식이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시집 '안 좋은 날이 좋은 날'이 문학동네시인선 256번째 작품으로 출간됐다. 지난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한 박판식은 첫 시집 '밤의 피치카토' 이후 기묘하고 신성한 이미지로 독자들을 매료시켜왔다.
시인은 두번째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에서 자기 자신과의 불화를 날카롭게 포착했고, 전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에서는 고통을 거부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이번 네번째 시집에서 박판식은 이전의 저항적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힘겨운 일상 속에 이미 존재하는 기적적 순간들을 포착하고 알아보는 것이다. "인생은 기적적이다/ 깨물면 사과 씹히는 소리가 난다"는 시구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적들을 담아냈다.
사진 제공 = 문학동네
시인은 여전히 삶의 가장 고단하고 아픈 지점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우리를 씻어주고 있다"거나 "인생은 기적적이다"라는 표현으로 냉소 대신 "약간의 희망"을 창조해낸다.
시집의 첫 작품 '율리우스에게'는 자살을 시도한 천재 로봇에게 건네는 말로 시작한다. "인생은 끝이 없다, 그때까지 잘 지내렴 보고 싶은 율리우스야"라는 문장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완벽한 구원이나 깊은 깨달음, 값싼 위로 없이 그저 안 좋은 날을 견뎌낸 사람의 목소리다.
시집 속 화자는 스스로를 "인생 중독자"라 칭한다. '인생'이라는 단어를 시집 곳곳에서 반복하면서도, 매번 다른 질감으로 그것을 만져본다. 시인에게 인생이란 "내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일"이나 "할 수 없었지만 하려고 했던 일"로 "물결"치는 것이다.
"인생은 끝도 없는 비보호 좌회전"이고, "인생은 하찮은 시간 죽이기"다.
'빈곤미'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 나 홀로 외롭다"는 문장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영어로 되풀이한다. 홀로 되뇌는 이 목소리는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형식이다.
박판식은 "수신자가 받든 못 받든 저는 열심히 [편지를] 써서 부치고 있"다고 말한다. 시집 속 화자는 "서울살이에 실패하고 죽으려고도 해보"는 너에게, "미워하고 살되 우리 조금씩만 괴로워하자"며 "이 덧없는 시간을/ 같이 즐기고 싶"다고 건넨다. "다시 태어나지 마라, 태어나면 괴롭다"는 '마음의 편지'도 부친다.
외래 강사 대기실 서랍 속 영수증이 다음 사람에게 전해지듯, 시인이 부친 편지들도 독자들의 안 좋은 날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 독자들은 "바뀐 것 하나 없어도 인생이 달라질 때"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