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과 한국 드라마를 소비하던 일본 1030 세대가 이제 일상 대화와 광고, 방송 콘텐츠에 한국어 단어를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한본어(한국어+일본어)'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집중 조명하며, 과거 한국어를 억압했던 일본에서 청년층이 자발적으로 한국어를 받아들이는 역사적 역전 현상에 무게를 실었다.
NYT는 지난 1일(현지 시각) '일본의 새로운 유행어, 뜻밖의 기원은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고 일본 열도에 침투한 한국어 표현 실태를 다뤘다.
한글이 인쇄된 라면 패키지는 물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한국어 대사, 현지 음료 CF에서 광고 모델이 "괜찮아"라고 내뱉는 장면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단순한 콘텐츠 소비를 넘어 일본어 문맥 속에 한국어 어휘를 직접 차용하는 언어적 전이 현상이 자리 잡은 셈이다.
뉴스1
신주쿠 한인타운 인근에서 만난 대학생 다카마쓰 모에카(21)는 현지 청년들의 언어 습관을 여실히 드러냈다. 다카마쓰 씨는 "일상 대화에서 '진짜'나 '미안해'를 자주 섞어 쓴다"며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지만,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어 융합 현상의 기폭제로는 2018년이 지목됐다. 당시 방탄소년단(BTS)이 '러브 유어셀프 전 티어'를 발표하고 블랙핑크가 도쿄와 오사카 투어를 진행하면서 팬덤의 언어 수용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사사 히로코 사이버한국외대 교수는 현지 K팝 팬들 사이에서 "한국어 단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직접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이어진 집콕 생활도 확산 속도를 끌어올렸다. 미디어 노출 빈도가 급증하면서 일본어 체계에 없는 독특한 호칭이 현지 일상에 그대로 흡수됐다.
남성이 친한 연상 남성을 일컫는 '형'이나 여성이 손위 여성을 부르는 '언니' 등이 대표적이다.
최은경 간사이대 교수는 "한국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됐다"며 "한국어 사용은 K팝이나 한국 문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유사한 발음 구조와 잦은 양국 관광 교류 역시 언어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했다.
NYT는 이번 현상을 과거 일제강점기 역사와 대조해 서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한국어가 배제되고 한국어 신문 폐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가혹한 언어 말살 정책이 이어졌다. 그러나 과거 한국어를 탄압했던 국가의 다음 세대가 자발적으로 한국어를 차용해 유행어로 소비하는 상황은 한국 대중문화가 확보한 글로벌 흡인력을 명확히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해석이다.
다만 이러한 언어적 확산이 제도권 언어로 굳어진 단계는 아니다. 도쿄 한국어학원 관계자 후지사와 마야는 "철저히 친구들 사이에서 쓰는 격의 없는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