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의 기업금융 경쟁이 조선·방산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우리은행은 한화그룹과 방산·우주항공 등 첨단전략산업 전반을 포괄하는 금융협력에 나섰고, 하나은행은 HD현대중공업과 한국무역보험공사를 연계해 조선 협력사 유동성 공급망을 확대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4대 시중은행 라이벌인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이, 조선·방산 산업의 양대 축인 한화와 HD현대에 각각 금융 파트너로 결합하는 구도가 형성됐습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 뉴스1
우리은행과 한화의 협약은 선제적 자금 지원 체계 구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한화의 중장기 투자 일정에 맞춰 여신 한도를 사전에 설정하고, 시설투자와 수출입 금융, 해외사업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을 적시에 공급하는 구조입니다. 그룹 차원의 투자 계획과 금융 지원이 연계되는 방식입니다.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자산관리 컨설팅도 포함됐습니다. 방산과 우주항공처럼 프로젝트 규모가 크고 자금 집행 시점 관리가 중요한 산업 특성을 반영한 설계로 해석됩니다. 지원의 중심은 그룹과 원청, 즉 산업의 상단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은행이 선택한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은행은 HD현대중공업, 무역보험공사와 함께 출연금을 보증 재원으로 활용해 1분기 내 4000억원 규모의 금융지원과 유동성을 협력업체에 공급하는 구조를 마련했습니다. 하나은행이 230억원, HD현대중공업이 50억원을 무보에 공동 출연하고, 이를 토대로 보증 여력을 확대해 대출이 집행되도록 설계했습니다. 지원 대상은 HD현대중공업이 추천하는 협력사들입니다.
이들 기업에는 보증료 100% 지원과 대출금리 우대, 외국환 수수료·환율 우대가 적용됩니다. 조선업 특유의 긴 제작·인도 주기 속에서 협력사의 현금흐름이 불안정해질 경우 납기와 원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한 모델입니다. 하나은행은 원청의 투자보다는 협력사와 기자재 업체, 즉 산업의 하단을 중심으로 지원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두 협약을 나란히 놓으면,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의 경쟁은 단순한 대기업 여신 확보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은행은 한화의 투자 일정에 맞춰 상단 자금 라인을 선점하는 전략을 택했고, 하나은행은 무보 보증을 활용해 공급망 하단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같은 조선·방산 산업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은행들이 자금이 투입되는 지점을 다르게 설정한 셈입니다.
산업 구도와의 연관성도 뚜렷합니다. 한화는 조선(한화오션)과 방산을 결합해 수출 산업의 외연을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잠수함과 특수선, 방산 수출과 우주항공을 하나로 묶는 구상입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 / 뉴스1
반면 HD현대는 조선 본업의 생산 역량과 공급망 관리 체계를 기반으로 글로벌 수주 경쟁력 강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은행들이 각각 한화와 HD현대에 금융 파트너로 결합한 모습은, 조선·방산 산업의 경쟁 구도가 금융 영역으로 확장되는 흐름으로 해석됩니다.
정책금융과의 결합 방식에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하나은행은 무역보험공사를 통해 출연금 기반 보증 구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중소 협력사까지 자금이 전달되도록 설계했습니다.
반면 우리은행은 한화의 투자 계획에 맞춘 여신 한도 설정을 통해 대기업 중심의 장기 거래를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같은 '생산적 금융'을 내세웠지만, 한쪽은 산업 상단의 투자 흐름을, 다른 한쪽은 공급망 하단의 현금흐름을 겨냥한 구조입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인사이트
이 같은 구도는 은행권의 기업금융 전략 변화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개별 기업에 대한 여신 중심에서 벗어나, 특정 산업을 축으로 원청과 협력사, 수출금융과 외환, 자산관리까지 연계하는 산업 단위 거래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조선·방산처럼 수출 비중이 크고 프로젝트 단위 자금 수요가 반복되는 산업은, 은행 입장에서 장기 거래를 구축하기에 유리한 분야로 꼽힙니다.
다만 승부는 자금이 어떻게 집행되는지가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은행의 선제 여신 한도가 실제로 어느 규모로 설정되고 어떤 조건으로 운용되는지, 하나은행의 4천억원이 협력사 현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집행돼 비용을 낮춰주는지가 관건이 될 전망입니다.
사진제공=하나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