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03일(화)

故이해찬 전 총리가 '민주진영 대부'로 불리는 이유... 이해찬의 삶을 바꾼 '1974 민청학련 사건'

지난 25일,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거목이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베트남 출장 중 향년 73세로 서거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은 한 정치인의 부고를 넘어, 1970년대 유신 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청학련 세대'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주진영의 대부라고 불리는 고(故) 이해찬 전 총리의 정치적 삶은 '민청학련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데요. 1974 민청학련 사건의 실체와 그것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유산을 재조명하며, 개인의 삶으로만 머물수 없었던 그의 생애를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수석부의장/ 뉴스1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수석부의장/ 뉴스1


1974년 4월 3일, 당시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전격 발동했습니다. 이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씌운 조치였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해찬 전 총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1년여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인혁당-재일교포-학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산 혁명 조직으로 조작하여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재심을 통해 밝혀진 진실은 민청학련이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순수한 학생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생전에 조사 과정에서 겪었던 가혹행위로 인해 손 떨림 증상이 생겼다고 회고하며, 이는 독재 정권이 개인의 신체에 남긴 잔인한 상흔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인사이트이해찬 전 총리 / 사진=인사이트


아이러니하게도 민청학련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를 이끌어갈 주역들의 '정치적 용광로' 역할을 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 외에도 당시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청년들이 훗날 한국 정치와 사회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서울대생으로 수감되었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현재 5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핵심 주동자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인태 전 정무수석은 현재 정치권의 원로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또한 관련자로 투옥되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명지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은 한국 사법 역사상 가장 뼈아픈 장면 중 하나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사형 집행과 궤를 같이하며, 당시 사법 암흑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만에 집행된 사형은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진상 규명을 통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으며, 2009년 법원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35년 만에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이는 국가가 과거에 저지른 폭력을 스스로 인정하고 바로잡은 역사적 결단으로 평가됩니다.


인사이트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이해찬 전 총리 / 사진=인사이트


이해찬 전 총리는 서거 직전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직을 수행하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의 서거 소식에 여권은 물론 야권에서도 추모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그가 민청학련 사건을 통해 겪었던 고초와 헌신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소중한 토양이 되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1974년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시작되어 2026년 국가장의 예우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적 삶을 관통하는 굳건한 철학은 다름 아닌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한 시대의 표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