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서거 76주기, 암살의 진실은 아직도 미완의 역사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76주기를 맞은 오늘(26일), 대한민국 곳곳에서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렸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김구 선생의 죽음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남아있다.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전종호 서울지방보훈청장과 이종찬 광복회장, 각계 인사와 독립유공자 유족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엄수됐다.
1876년 8월 황해도 출신인 김구 선생은 1894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준 선생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08년엔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해 조국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의병활동과 계몽운동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국무령·주석 등을 거쳤다.
1945년 8월 광복 후 11월 귀국한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는 백범 선생의 생전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암살범 안두희'는 왜 방아쇠를 당겼나
암살범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사건 당시 육군사관학교 8기 포병소위로 군 복무 중이었다. 해방 후 서북청년단 활동과 미군 방첩대 정보원 경력을 가진 그는 당시 26세의 젊은 장교였다.
안두희는 법정에서 "김구를 반역자, 즉 실제 또는 잠재적 좌익세력이자 분단 반대 세력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을 추진하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암살 동기로 내세웠다.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0년 6·25 전쟁 중 가석방되었고, 이후 군에 복귀하여 대위까지 진급했으며 제대 후에는 사업가로 활동하다 1996년 사망했다.
배후와 공모의 진실 규명... 76년이 지나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
그러나 이후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국회 진상조사위원회의는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우발 범행이 아니라, 군부와 정권 차원의 계획된 암살로 결론지었다.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 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안두희의 지휘라인에 있던 포병사령관 장은산, 육군정보국장 김창룡, 총참모장 채병덕 등 군부 고위층이 암살에 관여했다. 또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음이 드러났다.
안두희는 1955년 옥중수기 '시역의 고민'을 출간하며 "순수한 단독행동"이었다고 주장했지만, 1993년 진상위 조사에서는 이 수기가 군에서 대필하는 등 "조작된 위서"로 간주해 신빙성이 크게 감소했다. 실제로 안두희가 범행 동기로 밝힌 것과 달리 김구 선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김구 암살 배후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있었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던 점은 인정되나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미국 배후설에 대해서도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결과적으로 김구 암살 사건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한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당시 정치 세력 간 이념 갈등, 군부의 정치 개입, 권력형 범죄 등 대한민국 초창기 역사적 과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김구 암살 사건이 단지 한 위인의 죽음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현대 한국사회가 기억하는 백범의 정신
김구 선생의 서거 76주기를 맞아 한국 사회는 그의 삶과 정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4월 7일 백범김구기념관에 디지털 전시물 설치를 하고 재개관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백범의 사상과 철학을 알리는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백범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는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김구 선생의 애국심과 통합의 메시지가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오늘 한국 사회는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를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의 삶과 사상이 현대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고 있다.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민주주의의 발전과 사회 통합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 일지'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란 문구는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명문이다.
또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는 문구는 최근 '한류' 열풍에 힘입어 '문화강국'으로 도약한 후손들의 가슴에 큰 울림과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고 있다.
7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을 넘어 그의 정신을 계승해, 그가 꿈꾸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