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03일(화)

전문 번역가 vs 챗GPT 블라인드 테스트... 영문과 교수 16명 중 12명의 선택은?

한국문학번역원이 실시한 번역 대결에서 챗GPT가 전문 번역가를 제쳤습니다. 조선 시대 장유의 시 '홀로일 때 삼가라(愼獨箴·신독잠)' 번역을 놓고 벌인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국내 영문과 교수 16명 중 12명이 AI 번역을 선택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은 영미권 수출 예정인 이 작품에 대해 전문 번역가와 챗GPT의 번역 버전을 비교 평가했습니다. 누가 번역했는지 알리지 않은 채 한글 원문과 두 번역본만 제시한 결과, 교수 12명이 챗GPT를, 2명이 인간 번역을, 2명이 '판단 불가'를 선택했습니다.


AI 번역을 선택한 교수들은 한국 역사·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원본의 운율, 문체 재현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위로 하늘/아래로 땅이/내가 한 일 모를 거라 여긴다면/이는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구절에서 인간 번역자는 하늘을 'Sky'로, 챗GPT는 'Heaven'으로 번역했습니다. 유학자였던 작가의 배경을 고려할 때 물리적 공간보다 신의 개념이 담긴 'Heaven'이 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신독잠 영문 번역 텍스트. A(인간 번역)와 B(챗GPT) 비교 자료 /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실 제공


평가자들은 "원문의 대구법을 영문학적으로 잘 표현했다", "단어 수가 적고 간결해 원문의 느낌이 살아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반면 인간 번역을 선택한 교수들은 "비문법적 문장이 적다", "제목 번역이 더 자연스럽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판단 불가를 선언한 한 교수는 "만약 둘 중 하나가 AI 번역이라면 무엇이 더 좋은 번역임을 굳이 따지기 어려워졌을 정도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며 "AI가 인간 번역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진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챗GPT 같은 대형 언어 모델이 맥락 이해에 강점을 가진 데다 학습량이 임계점을 넘어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고 분석합니다. 최병호 고려대 휴먼인스파이어드 AI연구원 연구교수는 "적어도 한국어-영어 번역에선 인간 번역가를 대신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웹상에 공개된 데이터는 이미 다 학습했다고 봐야 하고 이를 통해 학습량이 임계점을 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테스트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실에서 진행됐습니다. 민 의원은 "AI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라며 "AI의 효율을 활용하되 이제는 인간만의 문화적 맥락과 윤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AI 번역 기술 발전으로 출판계에도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민음사·문학동네 같은 대형 출판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세계 문학 전집' 출간에 새로운 출판사들이 뛰어들고 있습니다. 저작권 보호 시효가 끝난 거장들의 작품을 AI로 번역해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입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된 이미지


30년 넘게 과학·기술 학술서를 펴낸 한 출판사는 작년 10월부터 3개월 만에 '어린 왕자', '변신' 등 12권을 출간해 화제가 됐습니다. 이 출판사는 전문 번역가 없이 제미나이로 편역하고 인간 편집자가 검수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문제점도 드러났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번역에서 "헛된 대화는 소용없습니다. 알빠노?"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킹받네!", "스불재" 등 신조어까지 고전 작품에 포함됐습니다. 출판사 대표는 "번역료까지 들면 책을 만들 수가 없어 AI 번역을 시켰는데, 신조어 번역도 세대 간 재밌는 소통을 위해 필요할 것 같아 일부러 그냥 뒀다"고 해명했습니다.


해외에서는 인간과 AI 협업 모델이 등장했습니다. 영국 '글로브스크라이브'는 작년 여름부터 책 한 권을 100달러에 번역해주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기준 원고지 1000장 정도 소설 한 권의 번역료가 최저 300만~400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가격입니다. 이 출판사는 AI가 대부분 텍스트를 번역하고, 문학성이 높거나 복잡한 부분만 인간 번역가가 수정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영국 번역가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언 자일스 영국작가번역가협회 회장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AI가 작가를 대신해 인간 번역가의 섬세한 작업에 필적하거나 심지어 능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국내 노승영 번역가는 "AI는 기존 인간이 갈고 닦아 놓은 번역 문장을 학습해서 쓴다는 점에서 조만간 기존 번역서의 대부분은 AI로도 충분할 것 같다"며 "다만 AI에서 형편없는 번역이 나오지 않도록 감수가 더 중요해졌다"고 전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