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하이닉스반도체㈜(SK하이닉스 전신)'를 인수했던 2012년, 주식의 시가총액은 약 6조원이었습니다. 워크아웃을 막 벗어난 메모리 반도체 업체였고, 업황에 따라 실적이 크게 흔들리는 기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장기 안목을 가지고 오랜 기간 운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회사로 여겨졌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손을 타고 14년이 지난 지금,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544조원(1월 26일 장마감 기준)까지 커졌습니다. 그리고 최태원 회장은 이 회사의 다음 목표를 '시총 2000조원'으로 설정했습니다.
최근 출간된 'SK하이닉스의 언더독 스토리: 슈퍼 모멘텀'에 실린 인터뷰에서 최 회장은 SK하이닉스를 'AI 인프라 기업'으로규정했습니다. 2030년에는 시가총액 700조원, 장기적으로는 2천조원까지 갈 수 있다고 봤습니다. 단순한 메모리 반도체 회사가 아니라, AI 산업을 떠받치는 핵심 기업이 되고 있다는 판단입니다.
최 회장은 그 이유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들었습니다. SK하이닉스가 주도하고 있는 HBM이 AI 가속기의 필수 부품이 되면서, 메모리 반도체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시장이 하이닉스를 여전히 커머디티로 보면 시가총액의 벽을 넘기 어렵다"며 "AI 반도체 회사, AI 인프라 회사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HBM은 처음부터 성공이 보장된 기술은 아니었습니다. AMD가 그래픽 성능의 한계를 넘기 위해 고안한 구조가 출발점이었습니다. 개발 과정에서는 적층 공정에서 칩이 깨지고, 수율이 나오지 않아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내부에서는 HBM 개발 조직의 상황을 '아오지 탄광의 절치부심'에 비유할 만큼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최 회장은 이 과정을 두고 하이닉스의 '독한 DNA'를 강조했습니다. "하이닉스는 반도체 경쟁 속에서 단련된 회사였고, '독하게 버틴다'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수 산업에 익숙했던 기존의 SK 계열사들과 달리,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하이닉스의 경험이 HBM 개발을 버티게 해줬다고 최 회장은 이야기합니다.
HBM을 둘러싼 상황은 사실 복잡합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한치 앞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 회장에게는 자신감이 넘쳐보입니다. 그는 "엔비디아 가속기의 병목은 HBM과 패키징"이라며 "이 복잡한 칩을 수율 70% 이상으로 만들고, 성능과 수율을 동시에 맞출 수 있는 곳은 아직 하이닉스와 TSMC뿐"이라고 자신했습니다. 하이닉스·엔비디아·TSMC의 협력 구도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하이닉스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상'의 위상을 드높였다는 자긍심이 담겨 있습니다. "2002년 하이닉스가 마이크론에 넘어갔다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쯤 벼랑 끝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말에 그 마음이 엿보입니다. 각국 정부와 빅테크가 AI 데이터센터와 인프라 투자를 논의할 때 한국이 빠지지 않는 배경에도 하이닉스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런 자신감에는 '선경반도체'와 관련한 개인적 이야기가 근거로 작용한 듯합니다. 최 회장은 1978년 설립됐다가 1981년 문을 닫은 '선경반도체'를 언급하며 "당시 회사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뛰어들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언젠가는 반도체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은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故 최종현 선대회장과의 약속도 다시 떠올렸습니다. 최 회장은 "선대회장께서는 하루 10억원, 연간 365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회사를 꿈꿨다"라며 "그 숫자가 꿈의 기준이었는데, 하이닉스의 2025년 영업이익 전망치를 보면 약 100배까지 왔다. 저는 그 꿈을 이뤄드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드린 아들은 그럼에도 '더 큰 미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최 회장은 "그래도 아직 배가 고프다"며 SK하이닉스를 더 거대한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2012년 인수 당시 시총이 6조원대였던 기업을 약 544조원 기업으로 바꾸는 데 걸린 시간은 14년입니다. 최 회장이 말하는 '2000조 기업'을 언제쯤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회사에서 AI 인프라 기업으로 바뀌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숫자라는 점에서, 사실상 회사의 방향을 다시 정하겠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최 회장. 90배 성장보다는 4배 성장이 덜 어렵기에 그의 포부는 '가능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시가총액 2000조'는 꿈이라기보다는 목표에 가까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