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국내 최초로 간이식 수술을 성공시킨 김수태 서울대 외과 명예교수가 4일 0시5분경 서울대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밝혔다. 향년 만 95세였다.
전남 무안 출신인 김 교수는 1952년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1966~1967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암 연구 중 "병든 간을 고칠 수 없으면 건강한 간으로 교체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장기이식의 길을 선택했다.
김 교수는 1970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콜로라도대 외과의 토머스 스타즐 교수팀에 합류해 신장·간 이식의 임상과 동물실험을 배웠다.
1969년부터 개 간이식 실험을 시작해 3년 동안 150여회를 반복한 끝에 1972년 개 간이식에 성공(67일간 생존)했다.
1977년 9월 국내에 장기이식연구회가 발족했고, 김 교수는 1978년 9월 국제이식학회 회원이 되면서 간이식을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
김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병원 외과팀은 뇌사자 관리에 관한 법적 지원이 없던 1988년 3월16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30분까지 10시간30분의 대수술 끝에 성공했다.
뇌종양으로 뇌사 판정을 받은 14세 소년의 간을 윌슨병에 의한 간경변증 환자 14세 소녀에게 이식했다. 이 소녀는 30년이 지난 2018년에도 건강한 중년 여성으로 생존해 있었다.
'국내 최초' 수술보다 어려웠던 것은 뇌사자의 장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법률 위반이었다는 점이다. 수술 당일 오전 긴급회의에서 당시 서울대병원장은 반대했다.
박귀원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논란 끝에 김수태 교수님이 '내가 감옥에 가더라도 (수술) 하겠다'고 그러셨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의 수술이 성공하면서 대한의학협회는 1989년 8월 뇌사의 입법화를 보건사회부에 건의했다.
한국에서 뇌사자의 장기이식이 합법화된 것은 2000년 2월9일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부터다. 2002년 2월15일 인천길병원에서 한국 최초로 합법적인 뇌사자 장기 적출이 이루어졌다.
당시 또 다른 어려움은 대량 출혈이 동반되는 간이식 수술 경험이 있는 마취의가 없다는 점이었다.
김 교수는 198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 있던 마취과 의사 고홍에게 미리 피츠버그대병원에서 간이식 수술을 참관하게 했다.
수술 장비도 충분하지 않았다. 간을 가리는 갈비뼈를 당겨 시야를 확보해줄 자동견인기조차 없어 김 교수가 사비로 미국 장비와 유사하게 제작해 사용했다.
환자의 경제적 상황도 여의치 않아 김 교수는 수술비를 위해 개인 돈까지 지원했다.
한국의 첫 간이식 성공 소식은 일본 언론까지 크게 보도했다. 일본은 이듬해인 1989년에 나가스에 나오후미 시마네대 의학부장이 처음으로 성공했다.
김 교수는 2018년 간이식 성공 3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병원장도 반대해 성공하면 병원 몫, 실패하면 김수태 몫이라고까지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도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수태, 이건욱 교수팀은 1992년 7월 뇌출혈로 뇌사 상태인 46세 여성 공여자의 간 일부를 선천성담도폐쇄증 1세 남아에게 이식해 아시아 최초 부분간 이식에도 성공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국내 최초 생체 간이식으로 볼 수 있다.
국내 간이식 성공률은 1980~1990년대에는 76.8%였으나, 2000년 이후 급증해 평균 90% 이상을 기록했다. 이는 독일, 미국 등의 평균 성공률 85%를 뛰어넘는 수치다.
김 교수는 1988년 간이식 성공으로 대한외과학회 창설 후 첫 학술공로패를 수상했고, 2000년 성곡학술 문화상, 2006년 성산장기려상을 받았다.
허정 전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대학병원에서 수술 잘하는 교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생활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유족으로는 2남1녀와 며느리, 손자 등이 있다. 발인은 6일 오전 9시다.